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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신학 50

                                                                                     이환봉 교수 (고신대학교)

  

1946920일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후 어언 반 세기를 지나온 이 시점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살피면서 21세기를 향한 개혁주의 교회건설과 개혁주의 세계건설을 위한 고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개혁주의 교회건설

  1930년대 한국교회는 밖으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안으로는 자유주의 신학의 도발로 인하여 최대의 혼란과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마침내 총회(27)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여 가결하고 총회(28)의 인준을 받은 조선신학교는 점차 자유주의 신학을 확산해 갔다. 이러한 혼탁한 시대의 탁류 속에서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앙의 변절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인본주의적 논리를 앞세우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총회의 교권을 장악한 후 개혁주의 신학의 파수와 교회의 회개와 개혁을 외치던 주의 종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인본주의적 논리와 정치적 이권에 의한 이합집산으로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마침내 총회 교권주의자들은 총회에서 일방적으로 전권위원회(35총회)와 특별위원회(36총회)를 구성하고 아전인수격의 법조문 적용을 통하여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던 경남노회를 일방적으로 강제적 분할, 선별적 해벌 등의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단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항의자들은 경남법통노회의 계승과 전통성을 고수하면서 임의적인 법 적용을 통한 총회 전권위원회의 불법적인 처사들을 지적하고 장로교 헌법의 하회권을 무시한 일방적인 노회분할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결국 총회 교권주의자들은 19515월 고려신학교를 중심하여 개혁에 앞장 선 종들과 합법적인 항거를 한 경남노회를 총회 밖으로 추방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탄의 책략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자만과 교권이 주의 교회 안에서 끝까지 승리할 수는 없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왕이신 주님은 이 종들을 붙드시고 개혁주의 한국교회의 재건과 개혁의 길을 여신 것이다. 마침내 고려신학교의 지도자들을 중심한 경남노회가 195210월 총노회를 발회하는 선포문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한국교회의 재건을 선언한 것이 바로 고신교회의 시작이었다. 오늘날까지 고신교회를 이끌어 온 고신신학은 타락한 교회의 정화를 통하여 한국교회를 새롭게 재건하는 사명과 평양신학교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교육을 통하여 교회의 참된 교역자를 양성하는 사명을 좇아 충성해 왔다. 특히 개혁주의 신앙의 전통과 생활의 순결을 새롭게 확립하고 파수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고신신학의 강조점과 특성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 할 고신교회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 현대교회는 새로운 인본주의적 논리와 더욱 교활한 교권주의에 의해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늘 고신의 신학과 신앙이 과연 이전처럼 교회를 해치는 인본주의적인 교권주의와 거짓 신앙의 인간적 논리에 항거하여 오직 말씀에 대한 철저한 복종과 순교적인 헌신의 열정으로 교회를 개혁해 나가는 위치에 서있는지 아니면 침묵과 방관 속에서 개혁주의 교회건설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세계건설

  고신신학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다. 개혁주의는 개인과 교회의 구원론적 의미만을 갖는 편협한 종교적 체계가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전 포괄적인 삶의 체계이다. 개혁주의 신앙과 사상이 개인과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적이라는 확신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 속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교회와 세상, 복음과 문화, 신앙과 생활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원적 사상구조들을 배격하고 항상 모든 것을 한 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안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혁주의 신학과 사상을 따라 박윤선 박사를 중심한 고려신학교의 지도자들은 미국 근본주의 신학이 복음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폐쇄적인 반문화주의로 흐른 나머지 주변사회와 문화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던 것을 정확히 간파할 수 있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려신학교를 통한 개혁주의 교회건설에만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칼빈학원의 설립(1955)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개혁주의 세계건설을 위한 유능한 기독교 인재들을 양성하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칼빈학원으로 부터 시작한 오늘의 고신대학교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개혁주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개혁주의적 고신신학의 이상과 열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오늘 우리 교회 속에 유감스럽게도 지난날 미국의 신근본주의의 오류와 마찬가지로 자기 폐쇄적인 부정적 사고와 도피적 분리주의에 빠져서 반문화적 축소주의와 방법적 편협주의를 지향하려고 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개혁주의의 풍요한 유산을 단순히 교회적 또는 신조적 체계 안에만 묶어 두려는 발상과 시도들을 경계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학이 교회 그 자체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교회와만 관련하여 사유화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의 주권자이시며 그의 왕국이 우주적인 차원을 갖고 있음을 실제적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려고 하는 잘못에서 떠나야 한다.

  사실상 고신신학은 한국의 어느 장로교회 보다 정통 개혁주의의 정신과 원리를 따라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문화 변혁자들의 양성에 앞장 서왔다. 고신대학교는 기독교대학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 기독교적 학문연구에 기초한 기독교적 고등교육과 기독교적 문화창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유능한 기독교적 인재를 양성하는 신앙과 학문의 공동체이다. 한국에 고신대학교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으로 개혁주의 세계건설을 위한 기독교대학의 실현을 위해 구체적인 교육적 또는 학문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오는 대학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기독교대학을 통해 배출되는 기독교적 인재들은 사회적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일꾼과 참된 문화의 건설자들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목적 있는 봉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 고신교회는 장성한 개혁주의 교회로서 개혁주의 세계건설을 위한 문화적 사명을 수행하는 이러한 기독교대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와 종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길이요 개혁주의 신학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자 동시에 우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적으로 확장해 가는 구체적인 순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고신신학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오늘날 교회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인본주의적인 교권주의와 반문화적인 축소주의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개혁주의 교회건설과 영광스러운 개혁주의 세계건설을 위한 모든 고신인의 역사적인 개혁의 사명을 새롭게 수행해 나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

Posted by jameskim

글쓴이: 오덕호 200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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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와 아류주의자



신학도들과 신학 문제를 토의하다 보면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불쾌감과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나와 정반대의 신학사조를 들을 때가 아니다. 물론 터무니없는 주장을 들을 때도 답답하지만 더 괴로운 것은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아류주의적일 때이다. 이들은 일류학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이 옳다고 주장한다. 일류학자가 편 논리의 타당성을 인용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일류학자가 말했기 때문에 그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아류주의자라고 한다. 자기가 그게 옳다고 믿을 객관적인 근거나 확신도 없이 더욱이 신학도로서 성경적인 확신도 없이 그냥 일류학자가 말했으니 혹은 요즈음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옳다는 자들이다. 물론 최근의 학자들이고 일류학자일수록 배울 것도 많고 옳은 것도 많을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단지 유명학자의 주장이기에 옳고 최근 학계의 동향이기에 따라야 한다는 아류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모습을 학생들에게서도 가끔 본다. 최근 학생들의 경향이 그렇기 때문에 그게 맞는 것이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논리, 혹은 타대학생들이 다 하기 때문에 우리도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 고민과 결단과 끓어오름 없이 그냥 유행에 휩쓸리듯 따라가는 모습 - 아류주의.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아류주의자일수록 자기가 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전통에서 자유롭고 새로운 학설을 자유롭게 따른다는 점에서 이들은 자유주의자라고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유명학자나 새 학설을 무조건 따르고 휩쓸린다는 점에서 이들은 종속된 자이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전통에 얽매인 보수주의자가 자유주의자가 아닌 것과 똑같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에 충실한 자이다. 그래서 진정 자유로운 신학도란 전통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새로 유행하는 학설이 무엇이라도 하든지, 교권이 무엇을 강요하든지, 외적인 것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을 통해 자기가 확신하는 것을 지켜나가는 자이다.

자유주의자는 보수적인 경향을 띨 수도 있고 진보적인 경향을 띨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전통에 얽매인 보수주의자도 아니고 새 유행이나 유명 학설을 맹종하는 진보주의자도 아닌 오직 성경을 통해 확신한 진리에 흔들림 없이 서서 소신 있게 나가는 자라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자유로운 분이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을 일컫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전통에 전혀 얽매이지 않으셨으며 교권의 압력에 영향 받지 않으셨다. 교권주의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좌익세력이요 진보주의자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당시의 신진세력, 혁명세력들에게도 전혀 휩쓸리지 않으셨다. 그의 가르침 중에는 혁신세력과 정반대되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마 5:38이하, 막 12:17, 등) 혁신세력이 보기에 예수님은 보수반동이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진리의 길만을 그대로 곧장 걸으셨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모습이다. 우리가 신학도로서 걸어야 할 길이 있다면 바로 이 자유주의자의 길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길로 하여 그대로 곧장 걷는 것이다. 온 세상이 왼쪽으로 가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다. 모든 신학자들이 오른쪽으로 가도 거기 휩쓸리지 않는다. 이게 참된 신학도의 길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바론 이런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결코 세상에서 좌익이나 우익에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거꾸로 말하면 세상에서는 중용이 아니라 극단을 취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치우쳐 왼쪽으로 가면 극단의 우익이 될 수도 있고, 온 세상이 오른쪽으로 치우치면 극단의 좌익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다. 온 세상이 전통에 얽매여있을 때는 자유주의 혁신 신학도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인간의 철학과 이성에만 의지하여 성경을 떠나 방종으로 가면 극단의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이런 자세를 갖춰야 한다. 무조건 전통만 맹종하는 것도 아니고, 유행 따라 옷을 바꿔 입는 여인처럼 세상 풍조 바뀔 때마다 세상 따라 이랬다저랬다 딴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일반 대학생들이 그렇게 산다고 그냥 그 세속적인 것을 흉내나 내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른 길로 잡아 거기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세상의 아류주의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자유주의자로 사는 것, 이것이 신학도의 길이고 하나님 종의 길인 것이다.

Posted by jameskim

이상규 교수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시작된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교회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독일의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교회는 독일, 화란, 프랑스 등의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런 개혁교회의 신학을 보통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3)란 넓은 의미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을 통칭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라는 말은 쯔빙글리(Zwingli, 1484-1531)와 칼빈의 개혁운동과 그 신학사상을 루터의 그것, 루터파’(Lutheran)와 구별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루터파(Lutheranism)나 개혁파는 다같이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司祭主義, Sacerdotalism)를 비판하고 개혁했지만 개혁파는 루터파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이 점은 로마교의전통’(tradition)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를 비교해 보면 그 경계선이 뚜렷해진다. 루터는성경이 금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있다고 보았으나 칼빈은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전통은 구속력이 없다고 보았다. 루터는전통의 폐기에 대하여 칼빈만큼 철저하지 못했다. 따라서 루터교에는 로마교적 잔재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지만, 개혁교회에는 로마교의 잔재를 말끔히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디아포라(diaphora)와 아디아포라(adiaphora)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견해차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바트부르그(Wartburg)성에 은거해 있던 루터는 1522 3월 비텐베르그로 돌아온 후 8편의 연속적인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복음(福音), 율법(律法), 이신득의(以信得義) 등은 디아포라(diaphora)로 보았으나 예배의식, 성상, 성직자의 예복 등은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간주하였다. 그는 디아포라(본질적인 것)는 어느 시대에서도 개변될 수 없는규범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아디아포라(비질적인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임으이로 정할 수 있는비규범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터교회 안에는 예배의식, 성직자의 복장 등을 포함한 로마교적 잔재가 남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모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개혁을 시도함으로서 로마교적 잔재를 일소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베인톤는 개혁주의란 반사제주의(反司祭主義) 일뿐만이 아니라 루터주의의 개혁으로 보았다. 그래서 베인톤는개혁교회라는 말은 쯔빙글리와 칼빈을 따른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개혁이란 말은 그들이 루터주의를 다시 개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즉 개혁이란 종교개혁의 개혁을 의미한다.”4)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루터주의(Lutheranism)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였던 클로스터(Fred Klooster)는 개혁주의의 독특성이란 바로성경적 원리라고 말했다.5)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를 보통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칼빈이 성경적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하는 말이다. 비록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히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화하였기 때문에 칼빈주의라고도 불리게 된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학체계가 보다 성경적임을 증명하고, 다른 신학활동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들이 신학을 교리화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이었다. 독일의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이 루터란과는 다르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였고, 화란의 개혁자들은 그들의 신앙이 알미니안주의자와 다름을 도르트 신조를 통하여 표현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칼빈주의자들에 의하여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대소요리문답(1647) 등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은 신앙고백을 성경과 같이 절대화하지는 않으나 신조(信條) 중요성을 강조한다.

결국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권위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는 인간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말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마디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16세기적 상황에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하며,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 외에도 소위 성전(聖傳)이라는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때로는 이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한다 하여 성경 보다 우월한 권위로 받아드렸으나 개혁주의는 모든 전통을 배격했다. 개혁주의는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교회건설이었다. 이것이 교회중심(Church-centered) 사상이다. 신학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하면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혼돈하거나 혼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란 그 이름처럼 헬라어복음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에 의해 주창되었지만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혹은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생성되었고, 20세기 후반인 1952년 조직된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1974년의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된 신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전도나 선교를 강조하고,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분리주의적 혹은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신자의 사회적 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는데, 이 점은 근본주의와 다르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지만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감성주의라는 점이 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무관심하고 이를 간과함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이런 입장은 교회관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긴다.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변혁적 성격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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